옛날 이런 시절이 있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부리나케 농장으로 달려간다. 차에 계란을 바리바리 싣고 오면 8시, 아침 먹을 새도 없이 바로 오토바이에 계란을 싣기 시작한다. 구멍가게, 식당, 다방이 막 장사를 시작할 무렵 배달을 맞춰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배달은 새벽 1-2시까지 계속된다. 알고 보면 자신만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아니다. 수퍼, 식당, 함바집들이 새벽녘까지 일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시절에는 라면에 김밥 한줄의 메뉴가 최고의 식사였다. 한데 끝내 김밥은 못 시킨다. 돈이 아까워서였다. 그러다 보니 위장병을 맨날 달고 살았다. 속이 쓰리고, 쓴 물이 올라오고... 한데 새벽에 농장에 가서 막 낳은 계란 한 알을 생으로 먹는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속쓰림 증상이 없어지곤 했다. 이 때 계란이 몸에 좋다는 것을 그는 새삼스레 깨닫곤 했다.
“나는야 계란인생”
한국계란유통업협회 강종성 회장은 스스로를 계란 인생이라고 부른다. 군 제대 후(80년) 바로 계란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만 32년이 지났다. 그가 장사를 시작한 구로시장에서는 그를 쇳덩이라고 불렀다. 80년부터 96년까지 만 16년간을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악바리처럼 일한 것을 두고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는 숫제 하루 2-5시간씩 자고도 특별히 어디 아프지도 않고 버텼다.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난 강회장은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리고 그는 시골의 할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군 입대 전 2급 전자 자격증을 딴 그는 원래 전파사나 삼성 같은 회사의 전자 기술자가 되려고 했다.
한데 군대를 제대했을 때 이미 컬러 TV 시대로 변해 있었고, 기술을 따라가려면 일정한 돈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형과 누나들 그 누구도 당시엔 그에게 천원 짜리 차비 한장 쥐어주지 못할 정도로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표범’이라고 불렸던 사나이
그 때 자주 발길이 미치던 곳이 바로 작은 아버지 집이었다. 계란을 공급하는 일을 하던 작은 아버지는 그가 와서 도와주면 1,000원, 2,000원의 차비를 쥐어주던 유일한 분이었다. 돈이 궁하면 들리게 됐는데, 작은아버지에게 그는 더 없이 좋은 일꾼이었다.
막 군대에서 다듬어진 최고의 체력에서 최고의 완력이 지칠 새 없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총수였던 그는 군대에서 표범이라고 불렸을 만큼 민첩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데 추석부터 시작한 일이 한 겨울에 이르러서는 참 일이 쉽지 않았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가 넘어져서 그 해 겨울에만 모두 147판을 깨뜨렸을 정도니까 말이다.
전기가 나간 날 매장 천장 쪽에 만들어진 좁은 다락방에서 웅크리고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동태처럼 굳어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26개월을 일하자, 작은 아버지는 그에게 매장을 물려줬다. 물려받았을 때 매장은 하루 150판을 50여 집에 배달할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기 매장을 갖게 된 그는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한 밤중의 눈동냥
그는 배달하면서 영업도 같이 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배달을 하다가도 신규 매장이 눈에 띄면 제일 먼저 달려가곤 했다. 근면과 성실 하나면 대한민국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억척같이 일에 매달린 결과 거래처는 빠르게 늘었다. 그의 마음 한 켠에는 “절대로 더 이상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사무치도록 새겨져 있었다.
한번은 내리막길을 중고 오토바이로 내려가다 브레이크가 풀리는 바람에 자동차 뒤꽁무니와 심하게 부딪친 적이 있었다. 오른 손과 왼발, 머리를 빼고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오른발 대신 왼발로 오토바이 시동을 걸면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지금도 그는 자랑을 한다. 오토바이에 계란판 싣고 배달하기 대회를 하면 1등할 자신이 있다고. 그는 한 번에 최고 80판까지 쌓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쉬 모이지 않았다. 특히 계란값 등락과 관련해 그의 경우는 정보가 떨어졌다. 계란을 어느 정도 미리 사 놓았다 싶으면 꼭 계란값이 떨어지고, 재고량이 거의 없다 싶으면 계란값이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시세를 결정하는 계란유통위원회와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국 그는 일이 다 끝난 한 밤중, 계란유통위원회 쪽 사람들의 매장에 가서 매장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 곳 매장에 계란이 쌓여 있으면 며칠 후 계란값은 올라갔고, 재고가 거의 없다 싶으면 계란값은 내려갔다.
유통업계에 웬 지역감정
업계에 몸 담은 지 13년(93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직원이 한두 명씩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년째 되면서 업계 사람들과 자연스레 교류가 시작됐다. 이러저러한 단체에 가입하고 협회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협회가 잘 돼야 업계도 살 수 있다!” 어찌보면 그 또한 피해자였다. 계란유통위원회 쪽 일부 사람들은 특혜를 입었지만, 다수의 업계 사람들은 불공정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생산자 단체와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했다. 유통인들은 헐값에 계란을 사들이려 했고, 생산자들은 유통인들을 사기꾼으로 몰았다. 정부 또한 유통인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서로 못 죽여 혈안이 돼 있는 사이 업계는 서서히 어려움이 쌓여 갔다.
계란 유통업을 빼 놓고는 소고기, 돼지고기, 여타의 유통 단체들이 모두 사라졌다. 각기 현재는 생산자 단체들만 남아 있다. 협회 내부 또한 분열이 심했다. 유통업계인데도 웬 정치인들처럼 지역갈등이 심했고, 협회 간부들은 각기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바빴다.
회원들의 전폭적 지지 획득
급기야 협회는 2000년 3개 단체로 쪼개지기에 이르렀고, 공멸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사이 뜻있는 회원들 사이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됐다. 공명정대한 유통위원회 및 협회 운영, 그리고 생산자 단체와의 상생을 지향하는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업계 공동의 발전을 위해 다시 조직을 합쳐야 한다는 회원들의 여론이 강하게 부각됐다.
그 중 처음에서 끝까지 강회장은 협회 재결집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2002년부터 내리 7년간 계란 유통위원장에 연거푸 피선됐다. 강회장은 09년 협회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개인의 이익을 떠나 철저히 협회와 회원들 중심의 운영 방식에 대해 회원들의 전폭적 지지을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5월 회원들의 추대로 다시 협회장에 재선됐다.
하지만 현재 업계와 협회는 외부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휩싸여 있다.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영세하게 운영되고 있는 업계를 틈타 대기업들이 빠르게 계란 유통업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풀무원, CJ, 오뚜기와 같은 식자재 업체들인데 이들은 농산물 분야 대기업 MRO들이다. 이들은 진입한 지 몇 년도 안되어 계란 유통의 30%나 차지할 정도로 급속도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로 1-2년만 지나도 업계 매출이 50% 이상 급감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강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계란 유통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재벌들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정이훈 기자 sbnews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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