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카르푸는 스위스에서도 철수한다. 스위스 전역의 매장 12곳을 인수한 곳은 스위스 현지 소비자협동조합 ‘코프(COOP)’다. 코프는 협동조합이다. 당연히 매장 노동자들의 고용은 승계됐고, 카르푸는 매각차익도 못 챙겼다. 카르푸의 한국철수가 현지화 실패 때문이었다면, 스위스철수는 ‘미그로(MIGRO)’와 코프라는 두 소비자협동조합과의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도 꼼짝마라
미그로와 코프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유통소매점이다. 우리나라 대형마트 못잖은 유통시장 장악력을 갖고 있다. 매장 규모는 대형부터 중소형까지 지역 특성과 여건에 맞게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상품도 곡류, 과일 등 농산품과 주방용기, 조리식품, 세제 등 공산품까지 구색을 갖췄다. 대형매장에는 커피전문점 같은 작은 카페도 있고, 약국, 주유소 등도 직영한다. 시민들이 사는 동네 동네 곳곳에서 생필품 위주로 소매영업을 하는 유통의 실핏줄이다. 소매유통 뿐만 아니라 금융 문화 가구 피트니스 등 대부분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소비자와 밀착도가 이다지 높다 보니, 스위스 국민 800만 명 가운데 미그로와 코프 조합원이 각각 250만 명, 200만 명이다. 이들 개미군단 덕에 양 조합은 스위스 소매시장의 40%(국내 총생산의 8%)를 점유하고 있다.
미그로와 코프의 경쟁력은 ‘이곳 상품은 질도 좋고 값도 적절하다’고 믿는 고객들의 신뢰에 바탕한다. 고객 충성도가 높아 시장 경쟁에서 주식회사가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
먹거리의 경우 로컬푸드를 중심으로 양질의 상품을 구비하고 있다. ‘지역에서 지역으로(aus der region, fur die region)’라는 미그로의 광고는 지역에서 생산된 농식품을 판매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많은 농장들이 미그로와 직거래를 한다. 농산물에는 어느 지역, 어느 농장에서 재배한 것인지 표시돼 있다. 가격도 무턱대고 싼 게 아니다. 스위스 소비대중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위스에는 ‘미그로 키즈(어린이)’와 ‘코프 키즈’란 말이 있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부터 이들 매장을 드나드는 아이들을 일컫는다. 신뢰가 세대를 이어 지속되는 것이다.
창업자, 국민사랑 한몸에
미그로는 매출액에서 세계 일곱 번째로 큰 협동조합이다(세계 으뜸은 미국의 선키스트). 미그로의 기업사에는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미그로는 1925년 취리히에서 사기업으로 창업됐다가 1941년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는데 그 중심에 창업자 고트리프 두트바일러의 입지전이 있다.
두트바일러는 2차 대전 때 사업이 망하자 브라질까지 가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트럭에 생필품을 싣고 지방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시장이 먼 사람들을 위해 설탕, 커피, 파스타, 소금, 코코넛 오일 등 일용품을 싸게 팔았다. 프랑스어 demi(절반)와 gros(도매)를 합친 말인 미그로는 그래서 도매와 소매 중간이라는 의미한다. 좋은 물건 싸게 파니, 장사는 대박이었다.
자식이 없던 두트바일러는 미그로를, 자기 부의 원천인 사회에 환원한다. 그가 택한 방식이 소비자가 사용하면서 소유하는 협동조합이었다. 조합가입비도 낮게 책정했다. 7만,5,000명이 참여했다. 미그로 성공의 기저에는 이들 조합원들이 이뤄낸 규모의 경제가 있다.
두트바일러에 대한 스위스 국민들의 사랑은 지대하다. 그는 2009년 현지 한 언론의 설문결과 ‘스위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2위’로 꼽히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인슈타인이 1위, 페스탈로치가 4위, 적십자 창립자 앙리 뒤낭이 5위였다.
‘이익=환원’ 인식 확실히
협동조합 미그로는 여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협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사회발전에 관심이 많다. 지역사회가 협동조합 발전의 모태임을 알기 때문이다. 순이익이 아닌 매출액의 1%(약 1,300억 원)을 사회공헌사업에 기부했다. 이들은 이익(profit)을 환원(turn over)이라 부른다. 교육, 예술, 레저 등의 분야로 지역 사회에 지원한다.
그 중 하나가 교육소외 계층을 지원하기 위해 1944년에 설립된 ‘미그로클럽 스쿨’이다. 지역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으로 1년에 45만 명이 이용한다. 수강료 일부를 미그로에서 지원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미그로는 오히려 생필품 가격을 인하하여 국내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지역사회 발전에는 이다지도 적극적이지만 해외시장 진출엔 관심이 없다. 협동조합은 ‘사람의 기업’이지 ‘돈의 기업’이 아니라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윤보다는 조합원 복리가 우선이다. 잉여금을 (지분따라) 배당하면 할수록 주식회사에 가깝고, 조합원의 복리 쪽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협동조합에 가깝다 믿는다.
미그로의 지역밀착성은 조합 운영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미그로는 중앙집권적이라기보다는 지역분권적이다. 전국 각 지역본부가 자체 결정 권한을 갖고, 또한 여러 위원회를 두어 공동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모델이다. 이같은 의사결정 방식의 바탕에는 창업자 두트바일러의 선구자적 결단이 있었다. 그는 협동조합 전환 후, 1인 지배 체계 대신 일반 조합원, 지역 조합, 연합회 3단계로 이뤄진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었다.
술 담배 팔지 않습니다
미그로의 조합원 복지 우선 정신은 윤리경영으로도 이어진다. 미그로가 매장에서 술과 담배를 팔지 않는다. 1920년대 노동자들이 술과 담배에 돈을 쓰는 모습을 본 두트바일러가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1961년부터는 제품포장의 모든 정보를 공개했고, 1970년대 들어서는 식품에서 항생물질과 살충제를 최소화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인철 기자 sbnews777@naver.com
미그로와 코프의 규모는
미그로는 시장점유율이 20%에 이르는 스위스 최대 소매유통기업이다. 스위스 전역에 600개 매장에서 2010년 기준 총 매출 32조원을 기록했다. 미그로 생협에 소속된 50여 개 협동조합 기업은 8만4천여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미그로에 이어 업계 2위인 코프도 직원 5만3천여 명, 2010년 매출 29조원을 기록했다. 1890년에 설립돼 2001년 전국 단일 생협이 됐다. 총 매출액은 미그로보다 적지만 유기재배상품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코프의 매출을 주도하는 품목은 환경이나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하는 PB상품, ‘코프 내츄럴 플랜(Coop Natural Plan, 환경과 동물을 배려한 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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