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지구촌 경제사회에 협동조합의 진면목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경제위기에는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보다 더 생존력이 강하며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에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금융회사들이 당연히 가장 거센 격류에 휘말렸는데, 금융 부문에 있어서도 협동조합형 금융회사들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드는 저력을 보여줬다.
규모나 운용면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협동조합형 금융회사로는 네덜란드의 라보뱅크, 캐나다의 데자르뎅, 덴마크의 메르쿠르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고객 밀착형 금융을 펼쳐 서민금융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가운데 네덜란드의 라보뱅크는 건전성과 안전성에 있어 정평이 나있다. 금융위기 때도 안전을 더 선호하는 돈들이 대거 은행을 갈아타는 덕에 예금자산이 20%나 늘어났다. 네덜란드 국내 대출시장 점유율도 사상 최고인 42%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가장 안전한 은행 상위 랭크
라보뱅크는 자산 규모 7710억 유로의 네덜란드 최대 은행이다. 2011년 기준, 조합원은 네덜란드 국민의 절반인 180만 명, 48개국 고객 1,000만 명, 141개 지역은행에 직원 5만 8,700명, 해외조직은 48개국에서 682개 사무소를 거느린 방대한 조직이다. 네덜란드 농업금융의 84%, 저축의 41%, 주택담보 대출의 30%, 중소기업 분야 금융의 38%를 차지(2007년말 기준)하고 있다. 보험, 연금, 자산관리와 투자, 모기지론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다루며 ‘고객을 위한 금융백화점’을 지향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2010년 9월 라보뱅크는 100년 만기 채권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를 성공적으로 발행했다. 100년 후 상환을 받을 수 있는 채권이라니. 투자가들이 라보뱅크를 얼마나 믿는가를 여실히 반증한다. 이는 세계 금융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 순위에서 5위 안팎을 오가는 라보뱅크는 근자에 들어서는 외형성장보다는 과거 성장을 바탕으로 ‘식품과 농업부문을 선도하는 은행’을 목표로 위상 재정립에 들어갔다. 협동조합 은행으로서의 가치 제고와 농업부문에 특화된 안정적인 리스크 관리를 다져가겠다는 생각이다.
2009년 취임 한 피엣 모어랑드(Piet Moreland) 회장은 라보뱅크의 정체성과 관련,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협동조합은행은 중소기업과 개인 대출에 집중하며 이것은 금융위기 이후 최대 강점이었다”며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제와 금융부문이 괴리됐는데 협동조합은행들은 아주 튼튼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신뢰와 책임감이 토대
라보뱅크는 1백년도 더 옛날인 1898년에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된 협동조합 은행이 그 모태다. 네덜란드 농촌지역 금융을 양분하고 있던 협동조합 은행 라이파이젠(Raiffeisen)과 보에렌린(Boe-renleen)이 1972년 합병하면서 지금의 라보뱅크가 출범했다. 회사명을 전신인 두 은행의 앞 두 글자를 합쳐 라보(RABO)라 지은 것은 1980년이다.
전국 각 농촌에 산재한 라보뱅크는 지역농민과의 끈끈한 유대를 바탕으로 한 신뢰가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조합원이 아니라도 거래가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조합원만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주인인 조합원이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조합이 무너지게 되므로 고객인 동시에 주인인 조합원은 자신의 책임을 잘 알았다. 이런 책임감을 알기에 믿고 대출을 해 줄 수도 있는 것이고. 결국 이런 신뢰와 책임감이 인적 토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신뢰와 책임감을 바탕삼아 라보뱅크는 든든한 재무구조를 자랑한다. 라보뱅크는 사업잉여금을 100% 적립한다. 배당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배당이 없어도 조합원들은 그 때문에 조합을 더 신뢰한다.
라보뱅크는 1898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1백년이 넘도록, 금융사업에서 벌어들인 잉여금을 한 푼도 배당하지 않았다. 공동자본금으로 적립해 다음 세대 조합원에게 물려준다. 이처럼 내부유보로 적립된 공동자본금만 무려 200억 유로(약 29조 원)로 현재 은행 전체 자본금의 ⅔에 해당되는 규모다. 내 주머니돈이 든든하니 왠만한 금융위기에도 거뜬하다.
지역과 중앙의 앙상블
라보뱅크의 경쟁력은 이밖에도 농식품 부문에 특화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든지,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네트워크를 확보(지난해 26억유로의 순이익 중 해외사업부문이 20% 점유)하고 있다든지 하는 점 등이 지적되지만, 아무래도 141개 지역은행과 중앙은행 간의 협력구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라보뱅크의 전국 각 지역은행은 독립적으로 관리 운영된다. 조합원 총회, 감독위원회, 이사회 등 세 기구가 있고, 산하에 전문경영인을 둔다. 조합원 총회에서 감독위원과 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같은 141개 지역은행들은 다시 12개의 지역대표자회의로 묶이고, 여기서 각각 6명의 대의원을 선출해 중앙대표자회의가 구성된다. 이들이 주요 정책을 심의 결정한다. 지역 라보뱅크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게 되는 구조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중앙은행이 결정권을 갖는 수직구조인데 빌해 라보뱅크는 지역은행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협동조합 원칙에 충실한 ‘정직한 은행’을 내세우다 보니, 과도한 위험투자도 않고, 서브프라임 모기지처럼 수상한 상품도 취급하지 않는다. 건전성과 신뢰도가 쌓인 배경이다. ‘정직한 은행’은 윤리경영에 입각해 상품을 개발하고, 나아가 사회공헌에도 열심이게 된다.
라보뱅크는 현재 국제사면위원회, 개발도상국을 위한 기금, 국제자연보호기금의 환경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지역 라보뱅크들도 네덜란드 전역에서 1,000개 이상의 관련 프로젝트들에 관여하고 있다.
전인철 기자 sbnews777@naver.com
협동조합 자본조달, 어떻게들 하고있나
협동조합은 주식회사에 비해 자본조달이 쉽지 않다. 이익을 그악스레 추구하지도 않고 되레 자발적으로 원가경영을 한다니, 대출심사를 하는 은행들로서는 선뜻 돈을 빌려주기가 그렇다. 또 시장에서 주식을 거래하지도 않으니, 직접 자본시장 조달의 길도 막혀있다. 기존의 협동조합들은 이를 어떻게 풀고들 있을까. 오랜 진화 과정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방법들이 찾아졌다.
1. 사업잉여금은 최대한 공동자본금으로 적립하고, 나머지로 이용배당을 하는 방법이다. 라보뱅크는 아예 100% 무배당, 즉 잉여금 전액을 적립해오고 있다. 그것도 100년 이상. 이처럼 든든한 자체자본을 쌓으려면 시간은 물론 조합원 상호 신뢰와 공동체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디면 열매는 그만큼 달다.
2. 협동조합 자체의 금융기능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스페인의 몬드라곤이 대표적이다. 몬드라곤의 ‘노동인민금고’는 몬드라곤 계열 협동조합을 신설 확장하거나 경영위기가 닥쳤을 때 자금수혈을 하는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3. 전국적 연합체가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는 각 협동조합 연합체가 해마다 잉여금의 3%씩을 적립하고 있다. 이 돈이 회원 협동조합의 금융창구 역할을 한다.
※ 김현대 등이 지은 책 ‘협동조합 참 좋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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