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준비물없는 학교’ 정책으로 전국 문방구들이 다 죽을 판입니다. 아무리 정책 취지가 좋다 하더라도 기존 문구점들이 대비할 시간이나 여건을 마련해주고 시행해야지, 우리는 그냥 길에 나앉으란 말입니까.”
한국문구유통업협동조합(이하 조합)은 현재 전국 각 교육청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대상으로 시행 중인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으로 영세 문구업체들의 폐업 등 경영난이 심화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최근 조합에서 내놓은 ‘준비물 없는 학교정책으로 인한 소상공인 피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부터 서울시 교육청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 교육청은 관내 초등학교 및 중학교를 대상으로 학습준비물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다. 무상지급액은 각 교육청별로 최저 2만원에서 최고 5만원에 이르러, 올해 전국 무상지원 예산규모는 총 836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선 초등학교들이 이 무상지원금으로 학습준비물을 일괄구매하면서 발생했다. 일선학교들은 거의 전 품목을 교원단체인 한국교직원공제회의 자회사인 ‘교원나라’가 운영하는 ‘교육기관 전자조달 시스템(S2B, School to Business)’을 통해 전자계약방식으로 일괄구매 하자 기존의 학교 인근이나 동네 영세 문방구들의 매상이 뚝 떨어진 것.
정책 역풍 문구업계 강타
사실상 학습준비물 구매 단일 창구가 되다시피 한 ‘교육기관 전자조달 시스템 S2B(학교장터)’는 국내 21,000여 개 교육기관이 2,000만원 이하의 소액 예산이 소요되는 각종 공사와 용역 및 물품의 제조 및 구매를 입찰할 경우 이용하도록 한 교육기관 지정 정보처리 창구로, 지난해 6월 15일 지정된 행정안전부 고시에 의거해 시행되고 있다. 현재 S2B 사이트에 공급업체로 등록 가능한 분야는 문구를 비롯해 생활, 전기, 전자, IT기자재, 건축, 인테리어, 설계, 차량, 관리용역대행 등이 있다.
그런데 학습준비물이 S2B를 통해 일괄구매 지급되는 바람에 그 역풍이 고스란히 문구업계를 강타하고 있다는 게 조합측의 하소연이다.
물론 조합측도 이 정책으로 학생들이 준비물을 미처 마련하지 못하는 일이 사라지면서 학습활동이 강화되고, 저소득층이나 맞벌이 학부모의 경우 심적 시간적 경제적 부담이 경감되며 학교측으로서도 준비된 수업계획으로 양질의 수업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 정책이 문구업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려도 사전 준비도 없이 시행되는 바람에 정책의 뒤안에서 문방구들은 눈물을 삼키고 있다.
조합은 무엇보다 특히 대형유통점이 입찰을 독점하기 용이하고, 중국산 등 저가제품이 대거 유통될 수 있으며, 저가경쟁과 매출저하로 문구업체들의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덤핑 입찰로 교재 질도 저하
단지 문구업계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사실 준비물을 일괄구매하는 탓에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질 낮은 학습교재를 받아 교육의 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다. 문구 제조 유통업체들이 S2B 시스템을 통해 납품할 경우 업체 선정은 최저가 입찰로 결정되기 때문에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납품하거나 저가의 중국산 제품을 납품할 우려가 다분한 것이다. 또 내구성을 지닌 학습준비물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재사용하기도 하므로 위생상의 문제도 우려된다.
그래서 조합은 업계의 어려움과 정책의 맹점을 동시에 보완하고자 ‘문구상품권’제 시행을 제시한다. 학습준비물 지원금을 학용품 구매카드 형태로 학생 개개인에게 지급하여 문구점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 취지나 영세 문구업체 보호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더욱 합리적이고 적절한 방법이라는 게 조합의 생각이다.
매출, 고객 수 격감
사실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으로 인한 실제 일선 문구업체들의 경영난은 심각한 수준이다. 매출도 격감하고 고객수도 현저히 떨어졌다.
서울 중량구 면목동에서 소매점 ‘자운문구’를 운영하는 이윤선 대표는 “중량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과거 8개의 문구점이 성업 중이었는데, 현재는 한 곳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뜩이나 학생 수 감소로 문구점 운영이 어려워지는 와중에 준비물없는 학교 정책으로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됐다”고 탄식했다.
이 대표는 “전년 대비 지난해 매출은 20%나 감소했고. 올해는 더 어려울 듯하다”며 “대형마트 문구점 때문에 매출이 격감해 장사를 더 해야하나 말아야 하는 지경인데 학습준비물마저 일괄구매 해 버리니 정부 정책이 원망스럽다. 정책 시행 전에 문구업계에 이를 알려주고 함께 대비책도 마련하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고 울분을 토했다.
경기도 부천시 심곡2동에서 문구도매점 ‘학생문구백화점’을 운영하는 황종복 대표는 입찰을 통해 납품을 하는 도매업체의 입장을 들려준다.
“정부정책이 꿈쩍이나 할까”
“학교 앞이나 동네 문구점들이 많이 없어지면서 도매기능도 위축됐다. 도매점들도 입찰에 많이 참여하게 되는데, 서로 경쟁을 하다보니 정상거래가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가격이 제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제살깎기 납품이 만연되면 결국 도매상들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서울 방학동 방학초등학교 앞에서 소매점 ‘토이문구점’을 운영하는 정은숙 대표는 “장사가 안돼 한사람 인건비도 안나온다. 궁여지책으로 학교를 찾아가 준비물 구매 시 문구점을 이용해 달라고 교장선생님이나 행정 담당자에게 사정을 해 봤지만, 학교장터를 통해 구입해야 한다고 거절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에서 도소매를 겸하는 ‘정일문구사’를 운영하는 서해흥 대표는 시내 한복판에서 직원 4명을 두고 가게를 시작한지 올해로 35년이 되었지만 지금은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경기불황인데다 지방은 특히 인구가 감소해 장사가 엉망이다. IMF이후 하루 1백만원 매상을 올렸지만 지금은 하루 10만원도 안된다. 옛날에는 한달에 복사지를 트럭 한 대씩이나 팔았지만 지금은 50박스도 못판다. 인터넷판매에 밀리고 학교앞 문구소매점이 문을 닫다보니 도매도 소매로 내려앉고 그나마 고사직전이다. 소매 하시는 분들 대부분 열심히 사는 서민들인데, 어렵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정부정책이 꿈쩍이나 할까 의문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도소매점 ‘오피스큐 경기남부유통’을 운영하는 이진재 대표는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 탓에 매출이 80~90%나 떨어진 곳도 있다. 초등학교 준비물을 몇몇 소수 입찰등록 업체에서 독식 하는 바람에 학교 주변 문구점 6곳이 모두 폐업했다. 이천 관내에서만 20여 개 초등학교 주변 문구점 100여 곳이 문을 닫아 150여 명이 실직 상태다.”고 밝혔다.
‘준비없이’ 뒷통수를 맞은 꼴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인해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 수가 감소하여 문구점도 덩달아 운영이 어렵거나 대거 문을 닫았다. 초등학생 수는 1991년 475만 9,000여 명에서 2011년 313만 2,000여 명으로 20년 새 43.2%나 줄었다. 또 전국 문구점도 1999년 2만 6,986곳에서 2009년 1만 7,893곳으로 10년새 33%가 감소했다. 문구도소매업계의 전체 매출액과 종사자수가 이에 비례해 줄어든 것은 불문가지다.
이같은 열악한 여건에서 문구업계로서는 난데없이 ‘준비물없는 학교’라는 정책이 ‘준비없이’ 뒷통수를 맞은 꼴이니 업계 종사자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다.
이에 대해 조합은 정책 자체를 폐지할 순 없더라도, ‘문구상품권’제를 시행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화상품권을 나눠주고 있는데, 학생들은 이를 갖고 문구 대신 게임이나 영화를 구매하고 있다. 조합이 발행하고 학교에서 구매하는 문구상품권으로 문화상품권을 대체해 달라는 것이다.
아울러 조합은 동네슈퍼를 살리기 위해 ‘나들가게’ 정책을 시행하는 것처럼, 문구업계에도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부의 리모델링 지원 정책 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리자 ihjung@sb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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