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이 화두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표심 잡기에 나섰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연일 ‘재벌개혁 정책’을 경쟁하듯 쏟아내고 있다. 재벌·대기업에 대한 국민여론은 날카롭다. 1%를 위해서 99%를 죽이는 것이 사회정의는 아니라는 게 핵심이다.
재벌이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정치권의 재벌개혁 논의가 반 재벌 정서에만 기대어 설익은 구호경쟁에 그치고 있다. 재벌개혁은 필요하지만 재벌가 빵집 몇 개를 압박하는 식의 ‘보여주기’ 방법으론 안 된다. 내수시장 강화와 동반성장 등 중소기업 정책 보완이 보다 근본적인 과제다.
재벌개혁은 재벌죽이기가 아니다. 도덕적 지탄만도 아니다.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한때는 우리 경제를 이끌었던 재벌이지만 과거 같은 경영방식으로는 국민경제에 폐해가 크며, 이제는 사회적 책임과 경제정의를 토대로 모두가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시대적 절박함 때문이다. 재벌 중심 사회체제는 결코 지속될 수 없고, 경제 또한 지속성장할 수 없다. 이런 구조가 고착된다면 결국은 그들도 스스로 만든 구조 속에서 도태될 것이다. 하기사 글로벌 기업은 나라가 망해도 해외로 나가면 그만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난한 집 맏아들>의 저자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는 한국 사회의 재벌은 가난한 집에서 혼자 대학에 간 맏아들에 비유한다. 부모와 동생들의 지원과 희생에 힘입어 성공했지만 가족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맏아들 말이다. 이제 그 맏아들은 물론 온 식구가 다같이 잘살기 위해서 공정성 투명성을 바탕한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재벌 자산 GDP보다 많아
오늘날 대기업 제품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전자제품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 재벌 중심 체제가 설득력을 얻는 근거이자, 재벌개혁이 난망해 보이는 이유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30대 재벌그룹의 전체 자산은 1460조5000억원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 1172조원보다 300조원 가까이 많다. 연간 매출은 1134조원으로, 국내총생산의 96.7%에 이른다. 1980년부터 2011년까지 30대 재벌의 자산은 70배, 매출은 48배로 불어났다. 계열사도 증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30대 그룹의 계열사는 모두 1150개로 2006년 731개보다 1.5배 늘었다.
5대 재벌그룹(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롯데)의 경제력 집중은 훨씬 심각하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의 분석을 보면, 국내총생산에 견준 5대 그룹의 매출액 비중은 2001년 49.5%에서 2010년 55.7%까지 늘어났다. 1980~90년대 2세 승계가 이뤄진 뒤 갈라져 나온 친족그룹까지 포함하면 이들은 거대한 공룡이다. 삼성·신세계·씨제이·보광·한솔 등 범삼성그룹, 현대차·현대백화점·현대중공업·성우·한라 등 범현대그룹, 엘지·지에스·엘에스(LS)·희성 등 범엘지그룹을 포함한 5대 범 재벌그룹의 국내총생산 대비 매출액 비중은 2001년 59.0%에서 2010년 70.4%까지 커졌다. 인구의 0.1%도 안 되는 재벌 총수와 일가친척들이 나라 경제력의 70%를 장악한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돈은 곧 힘이다. 재벌은 이미 대한민국의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구축했다. 그 그늘에는 재벌에 짓눌린 99.9%의 사람들이 있다. 골목상권에서조차 내몰려 생존권을 위협받는 소상공인들, 불공정하도급과 단가인하로 피를 말리고 대기업 MRO에 시장을 빼앗긴 중소기업들, 독과점과 담합에 눈뜨고 지갑을 털리는 소비자들, 매일 구조조정의 불안감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착취에 고용불안까지 겹친 비정규직들.
MB노믹스도 한몫
재벌 중심 경제구조가 심화된 데에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도 한몫을 했다. 30대 재벌의 매출액은 1990년대 들어 급상승하다가 2000년 들어 약간 둔화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급증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MB노믹스의 핵심은 규제완화, 감세, 고환율 저금리 정책이다. 이러면 재벌이 기업을 경영하고 이익을 내기가 참 쉬워진다. 이 대통령은 대기업이 수혜를 입어 이윤을 많이 내게 되면 (자발적으로) 투자를 늘이고 고용을 확대하여, 결국 그 혜택이 서민이나 중소기업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자총액제한제도도 폐지하고, 금산분리도 완화하고, 법인세도 깎아주고, 기업인들을 대규모로 사면복권까지 했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전략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기대를 저버렸다. 재벌들은 ‘기업 플렌드리’로 번 돈을 꽁꽁 금고에 쌓아둔 채 투자도 하지 않았고, 일자리도 늘리지 않았다. 아랫목은 절절 끓었지만 윗목은 냉골이었다. 더욱이 아랫목에서 온기란 온기는 다 끌어가니 윗목은 점점 더 식어갔다. 시쳇말로 재벌의 ‘먹튀’였다. 양극화는 더 심화됐다.
MB노믹스는 근본적으로 ‘친시장’과 ‘친대기업’을 혼동하고 있다. 하기사 대기업이 가시적 시장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게 그것 같은 착각도 들 게다. 또 MB노믹스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간과했다. 현 대한민국에서는 대기업이 잘되면 자연히 그 과실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서민들에게로 흘러간다는 이른바 적하효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재벌 기업들의 매출대비 고용도 줄어들고, 투자비중도 떨어지고, 순익 대비 법인세 부담도 낮아져, 재벌의 국가경제 기여도가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새누리당도 출총제 보완
정치권의 재벌 개혁 공약들은 상당수가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민주통합당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시키기로 했고 통합진보당은 재벌 해체를 강령으로 내걸기도 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마저 출자총액제한제도(이하 출총제)를 보완, 재벌의 사익 남용을 막겠다고 나섰다.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막고 성장동력 확충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해 출총제를 폐지했지만 대기업들에 의해 남용되는 부분이 있다는 게 박 위원장의 인식이다.
민주통합당의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정책은 상위 10대 재벌에 한해서 타사 주식 보유(출자한도)를 40%까지 인정하겠다는 구상인데, 김영삼 정부조차 출자한도를 25%로 낮춰 시행한 제도를 40%가지 인정한다는 것은 이미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수준에서도 대폭 후퇴한 것이라 실제 재벌개혁을 얼마나 이뤄낼지 미지수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를 보완책도 그렇다. 민주통합당은 위반 시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부과하고, 사업 이양을 강제하겠다는 방침이지만 과연 재벌에 이를 강제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전문가들의 의구심이 앞선다.
일감 몰아주기를 근절하겠다는 정책은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상태다. 기업오너의 자식들이 최대주주로 있는 계열 회사에 일감을 모두 몰아주면 그 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크게 오르게 되고, 그러면 그 배당 이득은 최대주주로 있는 오너의 아들. 딸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지난해 말 확정된 ‘일감 몰아주기 과세 방침’은 내부거래 매출이 총매출액의 30%를 넘어설 경우에 한해 초과 비율만큼 해당 기업의 개인 주요주주에게 증여세를 물리도록 하고 있다. 민주당은 일감 몰아주기로 이득을 얻은 총수일가에 상속세·증여세를 물린다는 구상이다. 또 이를 업무상 배임죄로 보고 형사처벌하는 한편, 공시·신고 의무를 부여해 이를 위반하면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하겠다는 등의 정책도 꺼냈다. 그러나 해당 기업의 이익이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 덕분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소상공인 생존권 보호
좀 더 강력한 재벌 규제책인 ‘계열분리 명령제’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재벌 그룹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골목상권을 장악해 영세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해당 계열사에 대한 계열분리 명령을 통해 지분 매각 등의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사업 한두 개를 정리한다고 해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완화되지는 않고, 출자총액제한제만으로는 이미 비대해진 재벌 독과점의 폐해를 시정할 수 없다 판단에서 나온 대안이다. 유사 이래 자율적 재벌개혁이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법적 제도적 강제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의 결과다.
전인철기자 sbnews777@naver.com
관리자 ihjung@sb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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