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일 스페인에선 자국 정부를 향한 열쇠기술자들의 작은 반란이 있었다. 스페인 정부가 대출금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강제 퇴거 집행을 위해 열쇠기술자들에게 집행관을 대신해 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열쇠기술자조합은 은행의 앞잡이 노릇이나 다름없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사건이었다. 이번 양심선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정부의 요청도 당당히 거부할 수 있는 그들의 힘과 용기다. 이처럼 스페인 열쇠기술자들의 소리없는 항변은 열쇠인들을 한 사람의 기술자로 인정하고, 또 범죄 예방 차원에서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열쇠 관련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내 열쇠산업과 종사자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한다면 스페인 열쇠기술자들이 보여준 당당한 힘과 용기를 우리 열쇠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열악한 경영환경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열쇠기술자=범죄자’라는 사회의 그릇된 인식, 여기에다 범죄 예방 차원의 열쇠관리법(가칭) 제정이 더더욱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거부권만 행사하는 경찰청의 미온적인 태도 등이 비교 자체를 떠나 국내 열쇠인들의 설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는 게 관련 업계의 시각이다.
“열쇠관리법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또 우리의 이익만을 챙기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아니다. 문 밖을 나설 때 열쇠로 현관을 잠그는 것이야말로 방범의 시작이라는 기초 상식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범죄 예방 업무를 수행하는 경찰청마저도 지난 2009년 열쇠관리법 제정이 수면위로 떠오르자 지금까지 줄곧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경찰청도 이제는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
지난 2월 27일 서울 시청인근에서 만난 한국열쇠협회 김석준 회장은 경찰청의 넘어설 수 없는 높은 벽으로 인해 쌓여온 그동안의 울분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
사회적 여론 확산되지만
특히 김 회장은 “열쇠기술자들의 자질 함양을 통한 사회적 인식 개선 차원에서 지난 2005년 국가공인 열쇠관리사 자격 제도가 도입됐지만 관련법이 없다 보니까 유명무실해졌다”며 “시험 응시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경찰청도 합격자들의 통계 자료만을 가져갈 뿐 제대로 된 관리감독은 등한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뚜렷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 채 열쇠관리법 제정에 반대만을 고집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9년 12월 28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렸던 ‘열쇠관리와 방범성능향상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법안 제정 필요성에 적극 동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책임 소재를 보다 명확하게 가리기 위한 법조항 신설과 함께 열쇠관리사 자격증을 관리할 민간단체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필요하다고 지적했었다.
하지만 경찰청은 2009년 말 국회 행전안전위원회 의원들 중심으로 열쇠관리법 입법 움직임이 보이자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며 경찰업무와 연계한 법 제정으로 재검토하자고 요청, 40개가 넘던 조항을 25개로 축소시켰다는 것이 열쇠인들의 주장이다.
이후 이 법안은 경찰청과의 합의를 토대로 행전안전위에서 수차례 논의가 되었지만 18대 국회가 끝남에 따라 자동 폐기된 상태다. 하지만 김 회장은 열쇠관리법안 재상정과 국회 통과를 위해 전국소상공인단체연합회를 포함한 관련 단체와 적극 공조해나간다는 방침이다.
‘열쇠 중요성’ 인식 확산 절실
열쇠업계의 어려운 현실은 지난 2월 26일 방송된 KBS 제1라디오 ‘라디오전국일주’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프로그램 내 ‘(창업)성공이 보인다’라는 칼럼을 통해 열쇠기능사 자격 취득 등을 포함한 창업 정보가 안내됐지만,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정작 소개된 내용은 디지털 도어록 제조사의 A/S 서비스팀 운영, 보험사의 자동차 개문 서비스 특약 확대 등에 따른 문제점과 그로 인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국내 열쇠업계의 적나라한 실상이었다.
이날 프로그램 청취자였다면 ‘어려운 현실만을 잔뜩 부각시켜놓고 결국엔 전문 기술자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충분히 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서울 금천구의 한 청취자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이후 소상공인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맞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업과 현실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는 예비 창업자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며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열쇠인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는 열쇠관리법이 하루빨리 제정된다면 열쇠인들도 전문 기술자로서 떳떳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김석준 회장은 방범의 중요성과 관련해 “열쇠를 수리하기 위해 신혼부부 집을 방문했는데 방범 강화 차원에서 열쇠 교체를 권유했다”며 “하지만 주인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수리만 요청했으며 며칠 뒤 도난 신고 현장에 함께 가자는 경찰의 요청이 있어 현장 확인을 위해 출동했는데 바로 그 집이었다”라고 리포터를 통해 본인의 경험담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인식개선 위해 다양한 변화
김 회장은 또 “잠긴 현관문을 두고 애기는 안에서, 엄마는 밖에서 서로 우는 경우도 수차례 접했다”며 “특히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에 출동, 문을 열고 들어가 중환자를 응급실로 이송시키는 등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적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김경인 수석 부회장도 “주인을 가장한 한 남자가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에 신분증 확인 후 현관문을 개방해주었데 바로 그 집에서 귀중품 도난사고가 발생한 것을 알았다”며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신분증을 몰래 촬영했던 사진 덕택에 사고 발생 이틀 만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도난 신고 현장 조사 동행, 시급을 요하는 개문 출동 등 열쇠기술자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또 열쇠인 스스로도 변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한국열쇠협회의 설명이다. 열쇠기능사 자격증 제도 시행, 복장 통일화, 신분증 목걸이 상시 부착,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 시 신분 확인 등이 한국열쇠협회가 지금까지 공을 들인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열쇠인 스스로도 변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지만, 관련법이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열쇠기술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될 권리와 의무 역시 퇴색될 수밖에 없다”며 “경찰청도 협회 사무실 직원 확충 등 본질을 벗어난 요구만을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이란 대의적 차원에서 열쇠인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 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주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김영욱 기자 sbnews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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