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O 업체 때문에 거래처 잃고, 거리에 나앉을 판
청계천 상가가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청계천 상가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이 곳에서 공급하고 있는 부품들을 다 끌어 모으면 비행기나 탱크마저 조립할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대한민국 물산이 대부분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곤 했다. 한데 요즘도 오밀조밀한 골목에 수만 개의 업체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 곳은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IMF 때도 견뎠는데...
이 곳에 입주해 있는 현대산업도 마찬가지다. 이 업체는 주로 공구를 취급해 왔다. 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산업 공구를 공급하는 중간 도매업체다.
30여년 전 이 업체를 창업한 김종한(69)씨는 그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다. IMF때에는 거래선들이 다 부도가 나는 바람에 이 회사 또한 수억 원대의 빚을 떠안게 됐다. 수년 전 금융위기 때에도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어냈다.
하지만 그의 공구 인생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아침 8시쯤이면 언제나 회사에 출근하곤 했다. 그리고 두명의 직원들과 함께 업무에 매달리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난 줄 모르고 지내기 마련이었다.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그는 저녁 8-9시까지 잡무에 매달리곤 했다.
과거, 일은 고돼도 보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또한 인터넷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발주가 대부분 인터넷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거래처의 규칙과 방식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일은 더욱 바빴다.
어느 회사에 500개의 물품을 공급한다고 하면, 입찰 시기는 하나같이 다 달랐다. 보통 1년 단위로 이뤄지는 물품 계약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계약 만료일이 되면 어김없이 입찰에 새로이 응해야 한다. 경쟁업체보다 더 유리한 단가에 물품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언제나 시장 상황을 다 꿰뚫고 있어야 한다. 수시로 물품 공급선을 체크해 물품 계약일 만료와 함께 적절한 단가로 입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한데 지난 해 10월 이 회사는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수십년 동안 애지중지 이어왔던 거래처가 하루 아침에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연 매출 4-6억원에 이르는 A라고 하는 자동차 제조 대기업이었는데, 회사 매출의 태반을 차지하는 업체였다.
거래선은 B라고 하는 어느 중견 MRO업체로 넘어갔다. B업체는 기존보다 현격하게 저렴하게 물품을 공급하기로 하고 계약을 채 가버렸다.
원래 A회사는 3만 개도 더 되는 부품들을 공급받는 회사였다. 이 회사에 물품을 공급해온 수백개의 중소 공급업체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게 됐다. A회사 입장에서는 일괄 물품을 공급하는 B와 같은 MRO 회사가 편리하긴 하다.
기존 물품 구매 담당자들을 대폭 줄일 수 있다. B회사가 적절한 시기에 물품을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B회사가 공급하기 어려운 물품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물품만 A회사는 기존 물품 거래처에 발주를 해 해결한다.
하루빨리 적합업종 지정을
문제는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수많은 기존 거래처들이다. B와 같은 대기업 MRO 업체들로 인해 청계천 상가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이러한 업체들은 대부분 대규모 그룹사의 어느 한 계열사로 출발한다. LG그룹의 서브원, 코롱 그룹의 KeP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업체들은 소속된 그룹의 물품 공급을 독점적으로 떠안기 때문에, 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이러한 MRO사들은 지난 10여 년 사이에 급격히 사세를 확장해 왔다. 2001년 3조7천억원을 기록한 대기업 MRO사들의 매출은 2009년 21조원의 매출을 기록해 연평균 34.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들 MRO 사들이 취급하고 있는 품목 또한 가리는 게 없다. 일반 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소모품들을 대상으로 한다. 화장지, 복사지, 볼펜에서부터, 안전보호구, 베어링, 골판지 등 수십만 가지의 물품들을 공급한다.
따라서 이러한 물품들을 공급해온 기존 유통업체들은 서서히 몰락해가게 마련이다. 김씨는 “태생적으로 나와서는 안될 업종들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라고 단호히 주장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당연히 이러한 업종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기업들이 대기업으로서의 위신을 지키지 못하고, 전통적인 소상공인 업종에까지 뛰어들면 전국의 소상공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동반성장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서비스업 적합업종 제도를 통해 대기업들의 중소 서비스분야 시장 잠식을 막아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정이훈 기자 sbnews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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